납량특집, 청와대의 얼굴없는 미녀

2008/7/31 by

지금으로부터 20년여년 전, 케이블TV가 없던 시절에 공중파 TV에서 방송하던 프로그램 중에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어떤 마을이나 특정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재구성하여 방송하는 일종의 공포물이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도 나름대로 납량특집이라는 이름으로 평상시보다 더 무서운 프로그램을 방송할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방송한 프로그램 중에 유명했던 것이 “얼굴없는 미녀”였다. 얼굴이 없는, 정확하게는 머리가 없는 처녀귀신이라는 원초적 공포를 자극한 이 프로그램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10여년이 지난 후에 리메이크가 되기도 했다.

미녀라면 당연히 얼굴이 있어야 할텐데, 얼굴없는 미녀라는 제목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다. 뒷모습 미녀나 100미터 미녀가 아닐진데 당연히 얼굴이 있어야 미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긴 설령 미녀가 아니더라도 머리 또는 얼굴이 없다면 무섭긴 마찬가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이 매끈한 일명 달걀귀신은 공포물의 단골소재다. 필자가 들었던 이야기 중 또 하나의 무서운 이야기는, 한 밤중에 조깅을 하는데 쪽진 머리에 소복입은 여자가 앞에서 걸어가길래 뒷태가 너무 아름다워 열심히 달려가서 앞모습을 봤더니 앞에도 쪽진 머리였다는 이야기였다.

이처럼 얼굴이 없는 귀신을 그냥 귀신보다도 더 끔찍해하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얼굴이 갖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인간의 몸에서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과 귀와 코가 있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입이 있으며, 얼굴 전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표정을 짓고, 심지어 눈빛을 통해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공포물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공포의 근원,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생각을 알 수도 없으며 대응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는 소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인간성이 없는 미지의 존재라는 점이다.

얼굴은 인간 개개인을 구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며 각각의 개성을 상징한다. 손이나 발만 보아서는 어떤 개인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얼굴을 보면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그래서 피의자들은 방송 카메라가 접근하면 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고, 형사들이 범죄자를 수배할 때에도 얼굴만 가지고 몽타쥬를 만든다. 방송 카메라가 길가던 사람을 찍으려고 할 때에도, 찍히는 사람들 중에는 얼굴을 가리고 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공인이 아니라 개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이 존중받는 것이며, 이른바 공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 예를 들어 정치인이나 스타와 같은 – 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며 설령 가리려고 시도를 하면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자리에서 연예인도 공인이냐 따위의 논쟁은 잠시 접어두자)

이번 정부 들어 신문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 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청와대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고, 따라서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공인이다. 게다가 청와대에는 그런 공인 중에서도 국민이나 외부를 상대로 대표적으로 나서서 발언을 하는 사람까지 존재하며 이를 가리켜 대변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언론에 청와대의 이름으로 무언가가 보도되려면 우선적으로 청와대 대변인의 입을 통해 나와야 하고, 그 외에는 대통령이나 담당 청와대 공무원 – 예를 들어 무슨 수석이라던가 – 의 이름으로 발언된 내용이 보도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청와대 대변인보다 더 많이 나오는 표현이 바로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다.

청와대 관계자라면 청와대에 관계가 있는 사람을 포괄하는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청와대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 전체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군부대에 신병을 면회 온 애인이 “관계’란에 “주 3회”라고 썼다는 우스개 소리에 등장하는 관계도 관계이고, 사람과 사람간의 연간 관계도 관계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청와대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도 청와대 관계자고 청와대를 청소하는 분들도 관계자이며, 심지어 청와대 정화조에서 변을 퍼가는 분들도 청와대 관계자다. 물론, 청와대 대변인도 관계자일 것이고, 수석 비서관도 관계자일 것이며, 심지어 대통령도 관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청와대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분이나 청소를 하는 분의 말을 듣고난 후 익명의 관계자라는 이름으로 기사화를 했을까? 3류 주간지라면 모를까 적어도 기자 고시를 통과한 중앙 일간지의 기자라면 아무리 익명이라고 해도 책임질 수 있을만한 사람의 말에 한해 기사화를 할 것이다. 따라서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라는 존재는 청와대 대변인이나 부대변인, 수석을 포함한 비서관, 그리고 대통령 본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작 문제는 위에 열거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밝혀서는 안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보통 얼굴을 가리는 사람이 범죄자이거나 사생활을 침해받기를 거부하는 개인인 것에 반해, 위에 열거된 사람들은 (전과자는 있을지언정) 범죄자 또는 피의자가 아니며, 그들이 익명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 역시 공적인 업무에 해당되는 내용이므로 사적인 내용으로 간주되어 보호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설령 그것이 공적인 입장이 아닌 사견이라고 하더라도, “사견임을 전제해” 말할 수는 있어도 “익명을 전제해” 말하는 것은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조직 체계 중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청와대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그 기본은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기사화된 청와대에서 나온 발언들에는 적지 않은 숫자가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로 처리되어 있다. 즉, 대변인, 부대변인, (수석)비서관, 또는 대통령 본인 중의 한 명일 공인 중의 공인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라는 이름으로 나온 발언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발언이므로 중앙 일간지에서 보도해서는 안되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중앙 일간지 또는 뉴스 공급업체들은 공공연하게 이를 기사화하고 있으며, 매번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라는 출처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은 기자들의 소양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명박 현대통령이 과거 BBK 관련 사건이 대선 기간 중 불거졌을 때 나온 이야기 중 “주어가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일화가 있다. 동영상에는 “BBK의 XX다” 라는 내용을 이명박 대통령 본인이 발언한 것이 선명하게 나오지만, 그 발언에 주어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주어란 무엇일까? 바로 문장에서 주체를 식별하는 부분, 사람으로 따지면 얼굴이 아닌가? 다시 말해, 얼굴없는 미녀이므로 그게 김태희인지 이나영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가장 흠모하는 미녀를 인용했음을 이해해 달라) 그 말 자체가 아무리 타당성이 있더라도 대선에 출마한 책임있는 공인이 하기엔 문제가 있는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결국 주어가 없다는 소리나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라는 표현이나 같은 개념이다. 어떤 소리를 했건, 그 소리가 맞건 틀리건 자신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소리다. 나중에 그 발언이 허위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냥 얼굴없는 존재가 한 소리이므로 대변인도, 대통령도, 어떤 비서관도 책임이 없다. 다만 허위 사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못해야 본전이고 잘하면 땡잡는다는 심보다.

얼굴없는 미녀라는데, 얼굴이 없으면 어떻게 미녀가 되겠는가? 얼굴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미녀일 수는 없다. 얼굴이 없음에도 미녀라는 것은 공포다. 익명인데 어떻게 청와대 관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름이 없는 청와대 관계자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실체가 있는 존재인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인가? 공인들의 정점에 서 있어야 할 청와대 관계자의 정체가 없다면 이것은 얼굴없는 미녀와 다를 바 없는 공포물이요 호러물이다.

결국 청와대를 대표하는 사람은 대변인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 본인이다. 지금 당장 익명의 관계자로 재미를 좀 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발언들에 대한 책임은 결국 청와대를 대표하는 이명박 대통령 본인에게 있다. 설령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가 실제로는 대변인이나 비서관, 심지어 청와대 청소부 아주머니라고 할지라도 결국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기사가 나갔다면 그 책임은 모두 이명박 대통령에게 지워지고 있다는 점을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배리 이진행 ( http://www.bloggershome.net/bar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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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재밌는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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